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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에서는 미국 여행, 미국 주요 대통령을 자세히 정리하여 다음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미국 여행, 미국 주요 대통령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미국 여행 시 미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이니 꼭 끝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미국 여행, 미국 주요 대통령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미국의 제1대 대통령으로서, 1789년 4월 30일부터 1797년 3월 3일까지 8년간의 임기를 맡았습니다. 당시 부통령은 존 애덤스였으며, 이후 존 애덤스는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워싱턴은 1732년 2월 22일에 대영제국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어랜드에서 태어났으며, 1799년 12월 14일에 향년 67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워싱턴은 당시 무소속으로 정치를 했으며, 그의 별명은 "미국의 국부(Father of his country)"입니다. 그의 배우자는 마사 워싱턴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대륙군 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독립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후 미국의 제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민주주의의 건립과 연방 정부 강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경험이 없던 워싱턴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미국의 국가 건설에 앞장서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농업 분야에서도 성공적인 경영을 통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 수행 외에도 나라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미국의 연방 시스템과 기본적인 법률 원칙들이 정립되었으며, 미국의 자립성과 주권을 보장하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그의 취임식 때, 그는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취임 선서를 하였습니다. 그의 선서문은 매우 진지하고 국민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미국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워싱턴은 특히, 자유와 독립, 연방주의, 국제적 중요성 등 미국의 핵심 가치를 공고히 지켜나갔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의 위대한 업적과 덕목,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 독립, 법치주의의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노예 해방, 미국 내전, 연방국 강화 등과 함께 미국 역사상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186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당선되어 1861년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이후, 남북 노예 문제로 인해 발생한 미국 내전(1861-1865)에서 연방군을 지휘하며 남부 연방국가의 분리를 막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의 대통령 시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1863년 1월 1일 발표한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입니다. 이 선언으로 링컨 대통령은 남부 지역의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는 미국 내전에서 연방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의 이러한 업적과 노예 해방 선언에도 불구하고, 1865년 4월 14일, 그는 노예 해방을 반대하는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라는 남부 지지자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미국 내전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과 미국 내전에서의 연방군 지휘로 인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업적과 희생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이름은 미국 역사상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노예 폐지 운동은 18세기에 시작하여, 1775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첫 반노예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어서 1780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가 최초로 '노예해방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북부의 4개 주들도 이와 같은 운동에 동참하면서, 1787년에는 북서부 영토(현 오하이오 주 및 그 주변)에서 '북서부 조례'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와 노예제를 여전히 법으로 인정하는 남부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는 값싼 흑인 노동자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노예 소유를 허용하는 남부와 금지하는 북부가 공존하면서 갈등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링컨은 당시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에서 노예제를 철폐하는 법안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1858년에는 "분열된 집에 대한 연설"에서 "노예제의 확산을 막고, 국민의 마음 속에 노예제의 궁극적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심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1850년대의 정치적 갈등은 새로 생긴 노예제를 확대할지 여부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모든 준주(organized territories)가 자유주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남부는 연방에서 분리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북부와 남부 모두 노예제가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 범위가 축소되거나 결국 폐지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연방 정부의 통제권이 노예제 반대 세력에게 넘어갈 우려에 대한 남부의 불안과 노예지지자들이 정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북부의 적대감으로 인해 1850년 말 위기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예제의 도덕성, 민주주의의 한계, 자유 노동과 노예제의 경제적 이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면서 휘그당과 "노우 낫씽" 등이 붕괴되고,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했습니다. 1848년의 자유지역당, 1854년의 공화당, 1860년의 헌법 연합 등이 그러한 예시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전국적인 정당은 1860년에 민주당이었으나, 이 역시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노예폐지주의자 윌리암 로이드 게리슨이나 중도 공화당 지도자 링컨 등의 북부 정치인들은 토머스 제퍼슨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선언문에서 이를 강조했으며,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예 반대론자인 링컨과 남부의 노예 지지론자들 간의 격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링컨은 북부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남부 7개 주는 1861년 4월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미국 내분과 분리를 선언하며 아메리카 남부연합군(‘남군’: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창설했습니다. 이후 1865년까지 4년간의 미국 내전(American Civil War)이 벌어졌는데, 이를 미국 남북전쟁(美國南北戰爭)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Fort Sumter)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을 통해 남부의 노예 해방을 발표하였고, 1865년 종전과 함께 흑인 노예들이 공식적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재건 시대라 불리는 종전 후 기간 동안 연방 정부는 연방군을 남부에 주둔시키고 남부의 변화를 시도하였으나, 사회적 변화에는 실패하였고, 유색 인종에 대한 격리 및 차별은 20세기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남부와는 달리 북부는 내전 이전부터 활발한 이민자들의 이주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민 러시는 서부 개발, 전후 산업 인력 충원 등 다양한 필요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으며, 미국 사회에서 기피되던 남유럽 및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과 중국 이민자들도 19세기 말에 대거 유입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1869년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완료함으로써 광범위한 영토와 이민자들을 기반으로 유럽을 넘어 나아가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석유와 철강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며, 시카고, 피츠버그, 클리블랜드 등의 산업 대도시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토마스 에디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라이트 형제 등의 발명품들이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고립주의적인 성격을 벗어나게 되며,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카리브해와 필리핀 등을 미국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는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아메리카 연방국이 아닌 남부의 아메리카 국가인 남부 연방국의 대통령으로 활동했습니다. 데이비스는 남부 주인들의 노예 제도 유지를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북부와의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7개의 딥 사우스 코튼 주들인 사우스 캐롤라이나,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의 대통령으로 활동하면서, 데이비스는 남부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북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데이비스는 플로리다에서 결국 포로로 잡혀서 연방국에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데이비스는 노예 제도의 폐지와 인권 문제에 대한 논쟁이 가열해지는 시기에 영구적인 퇴각을 선언하고 미국 정치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1913년부터 1921년까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힙니다.
윌슨 대통령은 진보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그의 정책은 미국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것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역사적인 행보 중 하나인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국으로 참전하면서 미국이 세계 대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미국을 진보주의 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경제 침체와 인종 문제, 노동자 문제 등에 대해 대응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를 위해 신문, 방송 등을 통한 대중 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대외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미국이 세계에서 자신감 있게 발언할 수 있는 지식인들의 등장을 촉진하였고, 이를 위해 미국의 대학교육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미국의 국제적인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국제연합을 창설하였습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은 인종 문제에 대한 대처와 대규모 국내개입 등의 문제로 인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세계 대전에서의 미국의 역할, 베르사유 조약 등의 문제에서 대립이 일어나면서 미국 내부에서는 윌슨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였습니다.
테드디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테드디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1901년 맥킨리 대통령 암살로 부터 미국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진보주의적 보수주의자'로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경제적 성장과 보호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정책을 전개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의 국력을 강화하고 국제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 군사력과 해군력 확충을 추진했습니다. 이를 위해 국방 증강과 함께 해외 위성 국가 획득을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세계 대열에 발을 내딛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자연과 환경 보호를 위해 국립공원과 자연보호지역을 개발하였으며, 이러한 활동을 통해 환경보호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미국 내부에서의 집단 간격차에 대해 인식하고 미국의 사회적 정의를 위해 노동자 보호와 일자리 창출 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외정책에서도 불의의 상황에서 일어난 살인적인 일을 허용하며, 우월주의적인 입장에서 중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압제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일부 인권단체와 논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미국의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리더십과 정책은 미국과 세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독보적인 산업력을 갖추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고립주의를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고립주의 원칙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함께 사라져 보였지만, 윌슨 대통령이 전후를 주도하여 창설한 국제연맹에 대한 의회의 참여 반대로 다시한번 명확해졌습니다. 미국은 보호무역주의적 제도인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도입하여 영국의 전후 몰락 이후 공석이 된 시장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보호무역주의, 악성 제고 증가, 독일의 전후 배상금 문제에 따른 초인플레이션, 은행과 기업의 무분별한 투자 및 대출은 결국 1929년 세계대공황을 일으켰습니다.
세계 경제가 마비된 가운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도입하여 공공사업 확대 등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주창하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동계층을 위한 공정노동표준법, 사회보장법 등의 정책도 시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산업 발전 기간 동안 소외되어있던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유럽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등 정치적 극단주의가 성행하였고,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는 다시 한번 세계대전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어느 정도 안정세를 유지했지만, 이후의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규모 전쟁과 국제정치적 동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뉴딜 정책
20세기 초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에 뉴딜(New Deal) 정책을 도입하였습니다. 이 정책은 경제적인 안정성과 사회적인 안녕을 추구하기 위한 것으로, 주로 정부의 개입과 규제를 통해 구현하였습니다.
뉴딜정책은 일차적으로는 대공황에 대한 대응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경제활동 촉진을 위해 공공사업을 확대하고, 농산물 생산을 조절하여 과잉 생산을 막았습니다. 이를 위해 AAA(Agricultural Adjustment Act) 법안을 통해 생산조절을 실시하였습니다.
뉴딜정책은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를 수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 권력이 독점 시장에 개입하여 규제하고, 동종 산업간의 규약을 만들어 관리해 나갔습니다. 또한 노동자 보호와 권리 증진을 위해 NIRA(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법안을 통해 최저임금제 도입과 집단교섭권 부여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뉴딜정책은 또한 사회복지제도를 구축하였습니다. 사회보장제도 도입과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 고용안정, 교육제도 개선 등을 통해 사회적 안정성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미국 경제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의 경제 회복과 세계적으로도 사회복지제도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미국 경제는 침체상태를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였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 경제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일본과 독일의 침공에 대해 중립을 유지했지만,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종료된 후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 대통령이 뉴딜정책의 정신을 이어갔으며,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동유럽 진출, 중국의 국공내전, 그리고 6.25 전쟁 발발은 미국을 대표하는 자유 진영과 소련을 대표하는 공산 진영 간의 냉전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1952년에는 공화당 소속의 2차 대전 전쟁 영웅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한국 전쟁을 종결시키면서 미국 내에서 자유시장경제와 복지제도를 접목시켰으며, 국민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산업 발전과 전쟁 등을 통해 노동자와 여성 인권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1920년 여성의 참정권 및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미국 수정헌법 19조의 채택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 확대와 사회적 기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민자들의 처우도 개선되었는데, 그동안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았던 남유럽 출신자 및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사회적 장벽도 점차 허물어졌으며, 1960년에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였던 존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의 인권 신장은 주로 백인들만이 혜택을 받았으며, 남부 주정부들은 흑백분리를 표명하며 남부에 거주하는 흑인들에 대한 권리를 여전히 박탈하고 억압했습니다. 1954년, 공립학교의 흑백분리가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정부들은 여전히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이어갔습니다. 1957년에는 알칸자스 주 리틀록에 위치한 백인 학교 등교를 결정한 흑인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연방군이 주방위군과 백인 주민들과 대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흑인들과 민권운동가들은 흑인 대우 개선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 중 마틴 루터 킹이 이끈 비폭력 저항 운동은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정치적인 성과로 이어졌는데,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흑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1964년 민권법’과 남부 흑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한 ‘1965년 선거 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케네디(John F. Kennedy)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제35대 대통령으로 역임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외교 정책 분야에서 유명하며, 미국-소련 간의 냉전 시기에서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면서 유럽과 미국 내에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청소년 대상 방송인터뷰 프로그램인 '미팅 더 프레스'에 출연하여 선거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수십만 명의 미국 국민들이 모여들어 단 한 사람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의 가장 큰 집합체가 되었던 베를린 벽 붕괴 직후, 베를린 시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연설입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직무 수행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베이 오브 피그스 사건에서 대응하는 것을 실패하였고, 남동부 지역의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대응 불량으로 비판받았습니다. 그의 대통령 생애가 종료되었던 1963년 11월 22일, 그는 텍사스 주의 다라스에서 암살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가 40대의 어린 나이에 당선되며, 뉴프런티어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존 케네디 대통령은 약소민족의 근대적 국민국가 창설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인정하고,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원조를 추진했습니다. 이에 따라 평화식량계획과 평화봉사단을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나, 1963년 11월 달라스에서 암살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부통령은 흑인들에 대한 법적 평등을 보장하며, 사회보장제도와 환경보호 정책의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1964년 11월에는 61% 이상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베트남 전쟁 문제로 인해 그의 정권은 공화당 닉슨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미국의 정치인으로,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했습니다.
리처드 닉슨은 1913년에 태어나 1946년과 1950년에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을 역임한 후, 1950년 미국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에서 8년간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1952년에 동방문제를 중심으로 당선된 대선 후보인 아이젠하워와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당선되었습니다.
1960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와의 경선에서 패배한 후, 닉슨은 1968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닉슨은 미국을 건국한 보수주의자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카메론 아이들(Cameron's Kids)"이라고 불리는 젊은 민주주의자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대학생 및 젊은 유권자층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닉슨은 민주당 후보인 허버트 험프리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국내외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직면하였습니다. 그는 대중적인 법안인 "환경보호법"과 "소비자 보호법" 등을 제정하고, 1969년에는 당시의 전략적인 중요성이 높았던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하기 위해 "베트남화전 종료"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당시 약속한 대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군 철수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과, 대선캠프가 불법적으로 미국 대선을 조작한 의혹을 받아 수사가 진행되는 등, 여러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결국 1974년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알려진 대선캠프의 불법적인 도청 및 개입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통령 직무를 사직하게 됩니다.
존슨 행정부와는 대조적으로,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행정부는 정부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하며, 국제외교관계에서는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외교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971년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와 1972년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였으며, 1970년 2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통해 베트남 철수를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닉슨 대통령은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1974년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존슨 대통령은 흑백차별 철폐와 사회보장제도 창설 등의 성과를 이뤄내며 1964년 대선에서 61%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정권이 위태로워지면서 그는 불출마를 선언하고, 결국 대통령직을 공화당 닉슨 대통령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정권교체를 성공시키며 중국과의 수교 등의 외교정책에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임기 중에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습니다. 그 후 지미 카터가 도덕 외교를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이란 인질 사태와 오일쇼크 등의 외교적 난관에 직면하여 재선에 실패했습니다. 1981년 이후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미국은 보수, 안정 기조의 색채가 짙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레이거노믹스 경제정책이 성공을 거두며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냉전체제의 붕괴로 인해 미국은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베이비부머 세대의 급격한 보수화였습니다.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 제40대 대통령으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미국의 정치인이자 배우, 기독교 지도자로서 활동했으며, 그의 대통령 시기는 '레이건 시대'로 불리웠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콜드 워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냉전을 이끌었던 인물로서, 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국방력 강화, 그리고 소비주의적인 문화와 가족 중심의 가치를 대두시켰습니다. 대통령 시기 동안 미국 경제는 성장하였고, 국방력도 강화되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반적으로 보수,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처음 당선될 때 미국은 인플레이션과 고용문제, 그리고 이란사태와 같은 외교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대규모 감세와 국방비 증액, 그리고 자유시장 원리의 적용 등을 통해 경제적인 발전과 국가 안보 강화에 힘썼습니다.
또한, 레이건 대통령은 국내적으로도 문화적인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가족 중심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토크쇼 문화(Talk Show Culture)'를 비판하고, 소비주의를 싫어하였습니다. 그의 대통령 시기 동안에는 유명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며, 이로 인해 약탈, 살인 등의 범죄율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범죄는 마약 중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대대적인 마약 및 범죄 수사 및 규제를 시행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민주당 소속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하며 전임 대통령들이 다져놓은 국내외적 성과를 기반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하고 IT산업을 육성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안정적인 내치와 외교정책, 그리고 경제 호황에 힘입어 클린턴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집권 2기에는 성추문 사건으로 인해 탄핵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2001년에는 공화당 소속인 조지 워커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테러조직인 알카이다에 의해 워싱턴 DC와 뉴욕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테러가 발생하여 미국과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임기 초반의 부시 대통령은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 공격에 대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했습니다. 미국과 동맹국은 알카이다를 지지하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으며, 대량살상무기(WMD) 생산 및 은닉 혐의를 받고 있던 이라크 후세인 정권에 대해서도 군사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제41대 대통령 조지 H. 부시(George H. W.Bush)
조지 H. W. 부시(George H. W. Bush)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 제41대 대통령으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는 1924년에 매사추세츠주 미팅(Milton)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는 그의 가족이 텍사스로 이사하면서 텍사스에서 자랐습니다.
부시는 미국 해군에 들어가 전투기 조종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석유 회사인 저스트 산즈(Jetust Sands)에서 일을 하다가, 텍사스 주지사, 국무장관 등 다양한 정치직을 역임하면서 대통령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통령으로 먼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일하면서 대한민국과의 자유무역협정(KORUS FTA)체결, 중동과 북한 등 다양한 외교 및 안보정책에 참여하였습니다. 이후에는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1989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식을 거쳤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높이 평가하며, 대한민국을 '시민적 선진국'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국내외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다양한 경제정책과 외교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국내의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세계 최초로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등의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1990년대 초반에는 해외에 주둔한 미군을 이용하여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막는 작전인 '사막 폭풍(Operation Desert Storm)'을 선포하고 수행하여 이라크를 밀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동독의 무력 충돌 후 독일 통일을 지원하였고, 소련의 해체에 대한 도움을 주며, 1991년 12월 발표한 '신세계질서'는 국제 사회에 대한 대처 방식에서 이전과 다른 접근 방식을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과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의 국내 정책은 성과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인 빌 클린턴에게 패배하였고, 부시 대통령은 하프브러더스 사건, 로스앤젤레스 폭동 등의 사건으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우수한 외교 능력과 국내 정책 분야에서의 노력으로 인해 미국의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
조지 W. 부시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부시 대통령 가운데 두 번째로 취임한 대통령이며, 그의 아버지인 조지 H. W. 부시 역시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전직 군인으로, 미국 공군 파이로트로 활동했습니다. 그 후 텍사스에서 석유 회사인 애니하우저-부시(Annie-Huizer-Bush)를 설립하여 경제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그는 텍사스 주지사와 백악관 경제 자문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일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전략 방어 이니셔티브를 발표하여 미국의 국방력을 강화하고,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혐의를 이유로 이라크에 대한 군사 작전을 벌였습니다. 이 작전은 이라크 전쟁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결과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무너졌습니다.
그 외에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건강보험제도 개혁과 학교폭력 방지, 미국 경제의 안정화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국제적으로는 남북한 정상회담과 중동 평화 협상 등을 이끌었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미국의 안보를 강화하고, 국내 경제의 안정화에도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시기는 이라크 전쟁 등의 군사적인 문제로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는 2009년 대통령직을 물러나면서 정치 활동을 중단하였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44대 미국 대통령으로서 2009년부터 2017년까지 2대에 걸쳐 대통령직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1961년 하와이 주에서 태어났으며, 캔자스 주에서 성장한 뒤 하와이 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 학사학위와 하버드 대학교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로스코리아에서 사회사업가로 일했으며, 이후 일리노이 주 상원 의원과 미국 연방 하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 위기, 이라크 전쟁 등을 둘러싼 불안정한 국제정세에서 대선을 이끌며 역사적인 당선을 이루었습니다. 대통령 취임 후,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대규모 부양책을 추진하였고, 국내 건강보험제도 개혁 등 다양한 내정과 외교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외교적으로는 중동, 아프리카, 유럽 등 다양한 지역에서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북한의 핵 문제와 이란의 핵 협상 등 국제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일본과의 안보 조약 체결, 쿠바와의 국교 정상화 등 다양한 대외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직 재임 기간 동안 다양한 이슈에 대한 대처와 리더십을 발휘하여, 미국 정치에서 큰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유무역 원칙을 중심으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를 추진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2007년 말부터 미국 경제는 심각한 경기 후퇴를 겪게 되었고, 초대형 모기지론 업체들의 도산으로 인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나면서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제위기는 2008년 대통령 선거 시기에도 여전히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대선에서 처음으로 유색 인종인 버락 오바마 민주당 상원의원이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미국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최대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며 국내 경제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또한, 대외정책에서도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방향을 추구하여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 설정에 노력하였습니다.
2014년 12월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히는 역사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이후 오바마 행정부는 쿠바와 국교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3차례에 걸쳐 쿠바 엠바고를 완화하였습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해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과 독일이 주도한 이란 핵협상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고, 2015년 7월 14일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는 또한 2030년까지 미국 발전소의 탄소배출량을 2005년 수준에서 32% 감축을 목표로 하는 청정발전계획(Clean Power Plan)을 발표하여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2015년 파리 기후변화 회의에서도 190개국이 체결한 파리협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습니다. 오바마 행정부의 주요 통상 의제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임기 마지막해를 보내고 있으며, 미국 의회가 TPP 비준을 조속히 처리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과의 TTIP 협상도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이상으로 미국 여행 시 반드시 알아 두면 좋을 미국 여행, 미국 주요 대통령에 대해서 자세히 정리하여 알려드렸습니다. 미국 여행에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